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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즈라이트

우리 2시간 먼저 만날래?

국립중앙박물관


S언니에게.

 

언니 안녕?

직접 연락하지 못하고 이렇게 닿지 않을 편지를 써.

 

최근 '몸에서 뻗어내는 글쓰기'라는 이민경 작가님의 수업을 들었는데 이런 얘기가 나왔어.

 

'레즈비언은 워낙 소외되는 경험을 많이 했기에 다른 사람들을 소외시키는 것을 두려워하고 그래서 한 집단에서 몰래 만나거나 다 같이 만나자고 한다. 따로 만나면 만나고 나서 죄책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듣는 순간 언니가 생각나는거 있지?

 

언니나 나나 속한 모임이 잘 유지되었으면 해서 우리는 '따로 만날까?'를 못하고 '2시간 먼저 만나서 밥 먹을래?'를 하곤 했잖아. 이 안에서 연애를 하면 안 되고 따로 만나서 몇 명 하고만 친해지면 안 되는 게 모임의 룰이었으니까. 그때는 그게 옳다고 믿었고 우리 모두의 룰이었어. 그 흔한 전화번호도 신상 때문에 주고받지 못해 인스타 디엠으로 몰래 연락하게 했던 그 룰이 지금은 왜 이리 숨 막혀 보일까?

 

결국 언니가 모임에서 나가고 사람들의 모임 참여도도 낮아져 모임은 자연스럽게 해체됐고 사람들은 흩어졌어. 언니의 계정도 어느순간 없어져 연락을 할 수 없게 됐어. 잘 지내? 언니라면 잘 지낼 거라 믿어.

 

우린 사람들에게 들킬까봐 모임 장소에서 지하철역 2-3 정거장 떨어진 곳에서 밥을 먹고 내가 먼저 일어나서 모임에 가면 언니는 조금 기다렸다 15-20분 정도 뒤에 모임에 왔어. 사람들은 우리가 같이 밥 먹고 온걸 아직도 모를걸? 막상 모임에선 둘이 만나고 왔다는 죄책감에 자리도 떨어져서 앉고 맞장구도 잘 안치게 돼서 다들 우리 둘이 친했다는 걸 모를 거야.

 

언니 소리가 낯간지럽다던 언니에게 나는 언니인데 어떡하냐며 언니를 몇 번이나 불렀고 내 이름으로 불리는게 어색했던 나에게 언니는 내 이름을 몇번이나 부르며 서로를 놀렸어. 그 모임에서 내 실명 언니만 알아.

 

내가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스타일이라 사람들과 서먹하게 지냈잖아. 지금도 사람들과 만나서 어색하면 어쩌나 매번 걱정해. 내가 나가는 모임마다 대화 레퍼토리를 몇 개씩 짜가는걸 사람들이 알까? 오래된 모임에서도 다들 친한데 서먹한 분위기가 잠깐이라도 나오는 게 싫어서 매번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준비하게 돼.

 

서먹한 분위기를 피하려 우왕좌왕하게 되는 거 너무 싫잖아. 생각만 해도 손에서 땀이 나고 식은땀이 나려고 해. 사실 이렇게 준비해도 우왕좌왕하게 되지만 말이야. 언니와 말하다 중간중간 끊기는 공백엔 배시시 웃으며 넘어갈 수 있다는 게 좋았어. 그 서먹함을 웃으면서 넘어갈 수 있는 사이가 많지 않은데 언니랑은 그게 되더라.

 

이렇게 보면 우리 모임이 오래 지속된 것 같지만 기껏해야 두 달 반 정도였어. 잠깐 생겼다 사라진 모임. 이 모임이 오래갔어도 서로의 죄책감에 못 이겨 결국 갈라졌겠지. 그런데 좀 더 자유로운 모임에서 우리가 만났고 서로 친한 분위기가 용인됐더라면 우리는 지금도 연락하고 지내지 않았을까? 카톡 아이디라도 받을 수 있었을 텐데. 같이 술 한잔 하고 서로의 어깨를 내어줄 수 있었을텐데.

 

지금 있는 독서모임엔 나보다 어린 친구가 들어왔어. 드디어 나도 언니로 불리고 있는데 언니도 이런 간지러운 기분이었을까 싶어. 생각해보면 언니도 어디 가서 막내가 더 익숙할 나이였는데 언니는 영원히 언니 같기만 해.

 

잘 지내? 언니를 만날 때는 비가 내리는 게 이상한 계절이었는데 지금은 일주일에 이틀이 넘도록 비가 내려.

 

난 잘 지내.

 

언니랑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워. 언젠가 연락이 닿아 만나게 된다면 그땐 다른 사람 눈치 보지 말고 하루 종일 비워두고 둘이서 밥 먹자. 그때도 서로 대화 빈 공간을 웃음으로 채우자. 언니가 건강하고 많이 웃는 하루들을 보내고 있으면 좋겠어.

 

2020.07.14

 

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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