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레즈라이트

펑크를 내다

태국 카오산로드 끝자락

 

펑크를 냈습니다! 죄송합니다!

 

주말 내내 아파서 분량을 채우지 못하거나 출석을 하지 못했다고 들어가 있는 모임마다 아팠던걸 홍보하게 됐는데 레즈라이트에도 펑크를 냈습니다.

 

되도록 펑크를 내지 않으려고 하지만 저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펑크를 내면 그 모임 활동을 끊고 도망가던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펑크와 불참에는 너그러웠지만 저 자신에게는 그렇지 못했고 '민폐'를 끼쳤다는 생각에 아예 도망쳐버리고 관계를 끊는 게 다반사였어요. 저번엔 여성이 양분화된다는 이야기와 모임 분위기에 대한 글을 썼는데 지금은 제가 도망갔던 이야기를 쓰고 있네요. 오늘의 글은 반성문입니다.

 

모임에 들어갈 때마다 의욕은 앞섰지만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것 같았고 즐겁자고 시작한 모임에 제가 잠수를 타거나 탈주를 하는 바람에 분위기를 헤치기도 했습니다. 다시 만나게 된 사람들에게는 사과를 했지만 아직 사과 못한 사람들도 많아요. 사과도 염치없게 최근에서야 하게 됐는데 다들 '지난 일이라 괜찮지만 앞으로는 그러지 않길 바란다'라고 해줘서 몇 번이나 고맙다는 답장을 보내며 울었어요.

 

여성주의자들의 오프라인 모임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최대한 많은 사람들과 교류를 쌓으려고 몸과 정신을 갈았고 재가 된 상태에서 잠수를 타고 도망쳤습니다. 몸글에서 이민경 작가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몸을 불사 지르고 죽는 패턴을 반복했어요. 무리한 거리 이동과 타이트하게 잡은 스케줄은 계획 자체는 완벽했으나 제 체력과 멘탈은 반쯤 죽어갔어요.

 

다들 쉬고 온다든가 다음부터는 꼭 나가겠다든가 하면 받아줄 사람들이었는데 저는 '오늘 00일이 있어서 불참합니다', '아파서 나중에 참여할게요'라고 말을 하는 게 죽는 것보다 더 힘들었어요. 몸글 수업에서 나온 협상과 고결한 죽음은 제가 매번 얽혀있던 굴레였습니다.

 

'모임에 2주나 불참하다니 죽어 마땅하다' '4일이나 잠수를 타게 되다니 아예 사라졌으면 좋겠다' 지금 생각하면 죽기엔 어처구니없는 이유였지만 죽음으로 향하는 정동적 회로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회사 옥상에 몇 번이나 올라갔어요. 옥상에서 내려다보는 도로와 인도는 아찔하기 그지없었지만 저에게 죽음은 그만큼 가까운 존재였습니다. 지금은 회사 옥상에 올라가도 맑은 하늘 사진을 찍으러 가는 정도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늘 모임마다 외쳤던 '펑크를 냈습니다. 죄송합니다. 오늘은 펑크 내지 않겠습니다'는 모임원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지만 저에게도 새로운 기회를 주는 말이었어요. 기존 모임에서도 한 번씩 펑크를 내곤 했는데 이렇게 와르르 펑크를 내고 사과한 적은 처음이었거든요. 이 말을 잠에서 깬 오전 6시에 눈을 뜨자마자 쳤는데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10시가 거의 다 되어서야 보내기 버튼을 눌렀습니다. 보내기 버튼을 누르고 10분 정도 채팅창을 꺼두었는데 다시 킨 카톡을 보곤 제가 가상의 단칼비언과 싸우고 있었단 걸 알게 됐어요. 역시 스스로에게 엄격한 건 자기 자신이라는게 와 닿는 순간이었습니다.

 

여전히 저는 저와의 협상이 서툴고 다른 사람들에게 용서를 구하고 양해를 구하는 것이 무섭습니다. 하지만 돌다리도 하나씩 두들기며 건너다 보면 언젠가 폴짝폴짝 다리를 넘어 다닐 수 있지 않을까요? 저의 오늘과 내일을 반겨준 비언들 정말 감사합니다. 물론 펑크 나지 않도록 앞으로 열심히 읽고, 공부하고, 사진을 찍을 겁니다.

 

이 글을 읽을 비언들도 부디 앞으로 스스로에게 넉넉한 하루를 만들어가길 바랄게요.

 

p.s. 이전에 한 레즈비언분에게 스스로에게 너그러워지라는 편지를 쓴 적이 있는데 막상 제가 그렇지 못해 부끄러워 쓰는 반성문이기도 합니다. 오늘을 비로소 안부를 다시 전해요. 당신은 어제보다 자신에게 너그럽고 따뜻한 하루를 보냈나요?

반응형

'레즈라이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너라고 쓰기 싫을 때  (0) 2020.08.11
나의 fairy god mother 에게  (0) 2020.08.05
우리 2시간 먼저 만날래?  (0) 2020.07.14
세상은 도망가고 싶은 일 투성이  (0) 2020.07.12
대전역에서의 마지막 글  (0) 2020.07.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