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무 책이나 한 권 꺼내 들었습니다. (...) 이 책이 첫 발표작인가 보네. 나는 혼잣말로 중얼거렸지만, 우리는 이 책이 지금까지 훑어본 다른 책들의 뒤를 잇는 꽤 긴 연작의 마지막권인 양 읽어야 합니다." - 자기만의 방, 129p
책에서도, 영화에서도 우리는 매번 매순간이 마지막인 것처럼 소비했던 때가 있지 않았나요? 입소문보다 의무감에 샀던 것들. 저는 꽤 있었거든요. 그것들 덕분에 우리는 이제 여성 서사에 대해서도 남감독 작품이라서, 남성 조력자로 인해 구원받는 서사라서, 레즈비언 커플의 엔딩이 결혼이라서 보지 않는 등의 각자의 기준을 세울 수 있었다고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여전히 새롭잖아요. 각 나라 여성들의 이야기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와 나누는 정서적 교감의 형태와 내용들이, 그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들이. 실존인물이 아니더라도 왜인지 자연스럽게 그리로 눈이 가게 되는 이야기들이 최근엔 많아지지 않았나요? 아직 부족하지만 그래도요.
여자친구와 했던 이야기인데 이제 가부장제는 더 이상 새로움을 가질 수 없어요. 이미 가부장제는 아들과 엄마를 결혼시켰잖아요. 여기서 얼마나 더 새로운 가부장을 만들어낼 수 있겠어요. 가부장을 유지하기 위한 새로운 도구 정도는 더 나오긴 합니다만 이것도 그다지 새롭지는 않죠. 그저 노란색 색종이에서 주황색 색종이로 바뀐 정도의 새로움이랄까요. 어차피 한국은 노란 장판 감성, 서양은 노란 가슴털 감성이잖아요. 남자들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씻지 않아서 그런지 그들이 쓰는 글에도 누린내가 나는 것 같아요. 가부장제는 이미 수십 세기 전에 새로움과 놀라움이 증발했습니다.
기껏 해봤자 낙태죄 반대나 외치는 그들에게, 기껏해야 대리모를 착취할 권리를 외치는 그들에게, 기껏해야 여성들에게 어머니 세대보다는 낫다는 소리를 하는 그들에게 어떤 새로움이 있을까요? 그들에겐 이제 억압과 유지만이 남아 있어요. 새로움은 해방이 남은 자들만이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이제 종말만 앞두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걸까요? 오히려 알기 때문에 더 발악하는 걸까요?
물론 지금 가부장제가 무너졌다거나 앞으로 핑크빛 미래만 남아있다거나 하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새로움이나 깨달음은 이제 남성들의 것으로는 채울 수 없다는 것이죠. 이러한 기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여성들은 새로운 무언가를 찾게 될 것이고, 스스로 생각하게 될 것이고, 스스로 만들게 될 테니 지금은 그 단계의 초석을 다져가는 느낌이랄까요. 우리가 글을 쓰게 된 것처럼요.
제가 레즈라이트에서 글을 쓴지도 이미 6개월이 넘어 7개월이 넘어가고 있습니다. 예전만큼 노션에 자투리 글이 넘치지는 않지만 계속 글을 쓰고 있다는 게 저 스스로도 놀라워요. 분명 바쁘고 힘든 시간들이 있었는데 모든 걸 다 글에 담진 않았더라도 계속 써왔다는 게 신기하기만 합니다. 휴식을 가질까 했는데 어느 순간 어떻게든 쓰고 있더라고요. 무언가 이렇게 오래 그리고 길게 해온 적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꽤나 많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학교 문학상에도 응모해서 떨어져보고 마감회도 개최해보면서 여러 가지를 시도해보고 있어요.
레즈라이트를 만든 이카고님과 서로의 글을 읽고 반응해주는 레라비언들 덕분에 저도 이만큼 글을 써오지 않았나 싶어요. 그중에서도 제 글을 좋아해 주는 여자친구에겐 어떤 말을 붙여도 고마움과 사랑을 다 담을 수 없어 매번 통탄스럽기만 합니다.
언젠가 우리의 글이 작품이 아닌 기록으로 남겨지면 누군가의 뒤를 이었다고 할 수 있을까요? 민경 작가님? 아니면 서한나 편집장님? 아니면 다른 분들? 기록이 어떻게 남게 될지 궁금해져 더 오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오래 살고 싶은 이유는 처음엔 '마흔 전에는 죽었으면 좋겠다'에 대한 저항이었지만 이젠 정말 못해도 120살까지는 살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100세가 되는 제 생일에 저의 1세기를 기념하는 파티를 할건데 다들 와주실거죠? 1세기에 여러분의 1세기도 함께 들려주세요. 저의 1세기도 여러분에게 들려주고 싶고 여러분의 1세기도 듣고 싶거든요. 저와 남은 세기를 채우는 동안 함께 글을 써 주시지 않을래요?
우리는 앞으로도 마지막인양 서두르지 말고 이때까지 그래왔듯 쓰고 읽어나가요.
제 소원입니다.
2020.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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