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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즈라이트

우리들의 방, 레즈비언 도서관을 꿈꾸며

 

출처 : pixabay

 

 "역사는 여성을 좀처럼 언급하지 않으니까요." - 자기만의 방, 72p

 

"여성은 자신의 삶을 결코 기록하지 않으며 일기를 쓰는 일도 좀처럼 없습니다. 남아 있는 기록이라고는 편지 몇 장이 유일하지요. 우리가 여성을 판단할 수 있는 희곡이나 시 한 편 남기지 않았습니다. 내 생각에 우리가 원하는 건 많은 정보입니다." - 자기만의 방, 73p

 

언급되는 존재에서 언급하는 존재로 넘어가는 과정은 얼마나 힘든가요.

 

폴란드에서 시위를 한다지요. 낙태죄 폐지를 요구하는 시위를요. 그들은 또 옷걸이를 꺼내 들었습니다. 비웨이브 시위에서 받은 검은색 옷걸이 장식이 아직 회사 키에 달려있어요. 반가움이 한탄으로 다가오는 순간은 꽤 자주 찾아오곤 합니다. 한국은 헌법불합치 결정이 나 올해 아무것도 진행되지 않기를 모두가 바랐지만 14주라는 말도 안 되는 기준을 정부에선 들이댔죠. 우리는 주수의 문제가 아니라 남성이 우두머리로 있는 정부와 남성이 점령하고 있는 의학계가 여성의 신체를 판단하고, 판결하고, '처단해도 되는 여성'으로 상정하는 것에 반대합니다.

 

비웨이브는 카페도 있고 뉴스에도 나오곤 하여 잊혀질 우려는 다소 적지만 글쎄요. 우리가 죽고 나면, 딸이 없을 우리가 죽고 나면 우리의 기록은 어떻게 될까요. 우리가 나눈 사랑이, 연모의 편지가, 우리가 서로의 손을 잡았던 나날들이, 우리가 부딪히고 있는 벽들이, 우리가 듣고, 보면서 웃고 울었던 작품들이 지금만큼 생생한 기록으로 남아 있을까요? 포털사이트가 문을 닫고, 위키가 닫히면 우리에겐 결국 책만 남을 텐데. 그렇다면 누군가는 책을 사야 할 텐데. 그건 여성이어야 할 텐데요. 우리는 그렇게 아직도 '돈'과 싸워야만 하는군요.

 

여성들의 시와 소설과 드라마와 영화에 취하고 레즈비언들의 역사와 분리주의에 대한 기록들이 궁금해서 찾아보니 결국 책이었습니다. 위키는 책도 포함하고 있었지만 남성중심적이고 결국 누군가 책이나 논문이나 기사에서 발췌하지 않으면 얻을 수 있는 자료는 한정적이고 공식문서로 인정받기 어렵죠. 그래서 결국 몇 번이나 책으로 회귀했습니다. 엘이에스비아이에이엔. 눈으로는 자동번역이 되지 않아 죽은 외국어를 다시 살려야 하는데도 원서를 사려고 하는 이유는 역시 기록은 가지고 있어야만 가치가 있기 때문이겠죠.

 

우리가 보스턴결혼이 절판이어 한탄하는 것처럼, 사포의 시를 중고책으로도 접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는 많은 단절된 여성들의 기록을 찾기 위해선 돈과 시간을 써야 합니다. 한 달에 1권을 사기로 한 여자친구와의 약속을 어기면서도, 저렴하다며 회유를 하면서도 끈질기게 그를 설득하는 이유는 번역서가 나오더라도 아직은 나오지 않은 상황에서의 기록은 가지고 있는 보관의 상태로도 가치를 발하기 때문입니다.

 

돈을 많이 벌고 아껴야 한다. 이 말을 하는 이유는 그저 우리가 적게 벌고 평균 근속 년수가 적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레즈비언들은 자신의 기록을 찾을 자료를 사서 보관하고 공부하고 그를 바탕으로 자신에 대해, 현재의 공동체에 대해 고심하고 발전을 하기 위해 더 논의하고 공부해야 하기에 많이 벌고, 그에 맞게 써야 한다던 거 아닐까요?

 

1년에 18만원 정도의 배당금. 누군가에겐 소소하기 그지없는 돈이지요. 그런데 적어도 6만원이면 아직 한국에 남아있는 분리주의와 여성 공동체를 다룬 원서를 살 수 있고, 5만원이면 여성 건강에 대해 전문적으로 다룬 번역서 1권을 살 수 있고, 3만원이면 레즈비언에 대한 기록이 담겨있는 원서를 운송비 포함하여 살 수 있고, 2만원이면 중고책 사이트에서 유일하게 1권 남아있던 사포의 시집을 살 수 있고, 또 다른 2만원으로는 위력에 의한 성폭력을 고발하고 지금까지 계속 싸워오고 있는 여성의 기록을 내 눈으로 담을 수 있는 기회가 생깁니다.

 

배당금을 받으라는 제안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저 돈을 벌고 모으라는 말이 아무 곳에도 쓰지 말라는 말이 아님을 알아주었으면 한다는 겁니다. 결국 여러분 스스로 살아남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른 여성들의 기록 또한 자신의 안으로 들이는 것도 중요하다는걸 말하고 싶었어요. 당신이 가지고 있고 내면으로 소화한 글들이 나중에 어떤 형태로 어떤 공동체와 어떤 여성들에게 도움을 가져다줄 수 있을지 모르니까요.

 

우리의 사랑은 정말 레퍼런스가 없을까요.

그들은 정말 기록을 남기지 않은 걸까요.

아닌걸 알고 아니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럼 그 기록들은 도대체 어디에 있나요.

어디에서 찾을 수 있나요.

괜한 서러움이 몰려들어 노트북을 강하게 들어 올린 밤입니다.

 

저 혼자 모은다고 뭐가 되진 않겠지만 우리가 모은다면,

우리가 자기만의 방을 가지게 되고 우리의 방을 만들면 그 공간을 함께 채울 수 있지 않을까요?

공간은 흔적을 남기고 흔적은 기록이 되죠.

페미니스트 도서관이 아닌 레즈비언 도서관을 꿈꾸며 글을 마무리해봅니다.

 

우리들의 방, 레즈비언 도서관을 꿈꾸며.

 

2020.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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