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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즈라이트

냉장고

출처 : PIXABAY

 

어느 소설에서는 냉장고에서 엄마의 울음소리와 등이 휜 소리가 들린다고 했다. 글쎄. 나는 냉장고에 등을 기대고 있으면 내가 숨죽이던 때의 두근거림이 들리곤 한다. 텔레비전을 의미 없이 흐리멍텅하게 뚫어져라 쳐다보고 별 관심 없는 신문 1면의 헤드라인에서 흥미로운 단어의 한자 뜻을 찾아보고. 텔레비전은 재미있었나. 애니메이션이나 드라마, 뉴스까지 집에 있을 때 안 본 프로그램이 없을 정도였는데 정말 그 순간의 기억들이 사라진 것처럼 내용들이 기억나지 않는다. 이름들은 다 알고 있는데. 그 순간에는 그런 스토리에 빠져서 봤던 것 같은데.

 

집에 의미 없이 꽂혀있는 청소년 필독도서들은 아직도 우리집 책장 대부분을 장식하고 있다. 지금 내 방 책장은 여성 시인들로 이미 반칸을 채웠음에도 불구하고. 아아 중립국 따위를 외치는 것들과 왼손잡이로 출생을 알아보는 그 역겨운 작품들은 집에 혼자 있는 나를 무섭게 만들었다. 누가 와서 잡아갈 수 있겠구나, 실제로 그때는 그런 뉴스도 많았다. 가족들의 웃음소리에 짜증이 나서 문을 열고 들어가 일가족을 살해했다던. 그래서 텔레비전을 보면서도 집에 혼자 있으면 웃는 소리를 최대한 내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 것들은 너무도 폭력적이었다.

 

그럼 컴퓨터는 재미있었나. 손가락이 아팠던 기억은 있다. 어디 나가서 놀 만한 돈도 없었으니 텔레비전 아니면 컴퓨터, 컴퓨터 아니면 텔레비전으로 일상에서 도피했다. 컴퓨터를 켜고 의미 없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외계 생물체를 죽이거나, 사람을 총으로 쏴 죽이거나, 중세 왕국을 구하거나.. 뭐 그런 게임들을 했는데 죽이는 것들이 거기서 싫어진 것 같다. 이 집에 혼자 있는 나는 누군가가 문만 따고 들어오면 저렇게 죽임을 당할 수 있겠구나 하는 감각. 그리고 나는 그것에 저항도 하지 못하고 이런저런 형태로 조각나 묵직한 항아리에 새겨진 이름으로만 존재하게 되겠지라는 감각. 죽는 건 어린 나이의 나에게, 그리고 여성이라는 성을 가진 나에겐 너무도 가까운 친구로 다가왔다.

 

이전 집에서 쓰던 냉장고는 재활용센터에서 들고왔다. 분명 저 냉장고도 처음 공장에서 나왔을 때는 하얀색이었을게 분명했다. 냉장고 청소를 몇 번이나 해야 조금 쓸만해져 같이 행주와 수건을 들고 와 함께 닦았다. 새 걸 살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을 했음에도 그걸 내뱉지 않은 건 집이 어려웠던걸 어렴풋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음 그래서 먹는 것도 게으르게 됐나. 청소년기에는 잘 먹지 않았고, 그래서 그게 지금 무릎 염증과 통증으로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 같다. 냉장고에선 이상하게 저릿한 향들이 났다. 더러운 냄새는 나지 않았다. 그냥 좀 서글프고 묵직한 우울한 향이 났다. 엄마는 음식 솜씨가 좋았는데도 우리 가족은 그 냉장고에 음식을 넣게 되면 잘 먹지 않았다.

 

이전 집에선 냉장고가 현관 바로 옆에 있었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달갑지 않았다. 집은 그 흔한 도어락도 없어 열쇠로 따서 들어가야 했는데 어디선가 달그락하는 소리가 나면 냉장고 옆에 숨었다. 냉장고는 꽤 커서 옆에 있는 찻장과 깊이 차이가 있어 누군가 집에 들어오면 바로 보였겠지만 그때는 냉장고 옆으로 걸어가 쪼그리고 앉았다.

 

무서워서 운 기억은 거의 없다. 울면 바깥에 들키니까. 우울한 향을 내던 냉장고는 그럴 때마다 웅장하게 돌아가는 소리를 냈다. 기계와 정신적 교감 같은걸 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유달리 내가 냉장고 옆에 기댈 때면 냉장고는 평소보다 크게 돌아갔다. 뭔가 튕기는 소리도 났고, 지잉하고 울리기도 했고, 우웅하고 무언가 돌아가는 소리도 났다. 그런 큰 소리에 묻어갈 수 있다는 게 어릴 적 나에게 얼마나 좋았는지.

 

지금의 집은 그때 보다 넓어졌고, 햇살도 나름대로 들어오고, 내 방도 생겼다. 냉장고도 이사를 오면서 버렸다. 이젠 냉장고에 있는 것들에서 어두운 냄새가 나지 않는다. 냉장고에 있는 것들도 잘 꺼내먹는다. 그런데 새벽 집 앞 가로등을 빛 삼아 냉장고에 등을 기대고 최승자의 시집을 읽는데 그 냉장고가 생각났다. 어제의 냉장고는 별다른 응답을 하지 않아 조금은 쓸쓸해져 무릎을 끌어안고 부엌 바닥을 한동안 바라보기만 했다.

 

-2019 이상문학상 수상작 장은진 〈울어본다〉가 생각나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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