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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즈라이트

욜라탱고와 엑스포다리의 금요일

욜라탱고 - 벌써 반쯤 마신 샹그리아


안녕하세요 여러분,

 

저는 지금 대전역 출구가 보이는 대전역 2층 카페에서 글을 쓰고 있습니다. 원래는 오후 5시에 출발을 하려고 했는데 여행을 갈 때마다 맑은 날씨 탓에 기력이 없어 3시 기차로 시간을 바꿨어요. 길눈이 어두워 역을 잘 찾아갈 수 있을까 했는데 친구를 만나러 갈 때도 탔던 버스라 익숙하게 역에 도착할 수 있었어요.

 

보슈 서한나 편집장님 잡문 프로젝트 2월 글에 욜라탱고라는 대전의 뮤직펍이 나와요. 델리스파이스의 챠우챠우라는 노래도 나옵니다. 이 노래는 저에게 큰 감흥은 없었지만 그곳에서 그 노래를 들으며 글을 읽으면 어떨까, 정말 청춘과 열망을 거기서 느낄 수 있을까 했는데 네.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남자 목소리는 이번만으로 족한 것 같아요. 너의 목소-리가- 들려-. 이 노래가 펍에 울려 퍼지는 순간 유튜브에서 봤던 공연 영상 속 장면에 들어간 것 같았어요.

 

펍에 챠우챠우와 새소년의 난춘, 안예은의 품행제로를 신청했어요. 욜라탱고에선 신청곡을 요청할 수 있거든요. 펍에 혼자 온 사람은 저뿐이었는데 사람들이 혼자 술 마시는 저를 힐끗하고 신기하게 쳐다봐서 저도 그들을 신기하게 쳐다봤어요. 저희 동네에선 이제 혼술 하는 건 꽤 흔한 일이 되었는데 말이에요.

 

나른한 챠우챠우가 끝나고 난춘이 흘러나올 때 펍에 있는 사람들도 아는 노래라면서 한마디씩 나누고 상체를 살짝씩 좌우로 기울이며 노래를 같이 들었어요. 난춘을 듣는데 김비언즈 나무님 글이 생각나는 거 있죠. 우리는 자기 자신을 더 바라보고, 서로를 바라보고, 건강하게 세상에 발을 내딛을 수 있어요. 여성들은 얼마나 바라볼게 많은 존재인지. 자신의 신체와, 자신의 눈과, 다른 여성의 눈과, 세상을 바라보고 마주해야 하는 여성들. 여성들은 얼마나 앞으로의 삶이 즐겁고 재밌을까요?

 

김비언즈 나무님 글을 욜라탱고에서 한 번 더 읽었어요. 저도 수영을 다시 시작하고 싶은데 언제 동네 수영장이 다시 문을 열게 될지 모르겠어요. 동네에 새로 짓고 있는 문화체육센터에 수영장이 들어올 수 있다는데 소문만 자자하고 어떤지는 잘 찾아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수영장이 들어왔으면 좋겠어요. 물과 더 가까이 지내고 싶어요.

 

펍에 큰 소리로 울리는 난춘은 새로운 느낌이었어요. 전에는 언니와 누워있던 따뜻하고 간지러운 기억이 떠올랐는데 거기에서의 난춘은 바다에 들어가 파도를 맞을 때를 연상시키게 했어요. 지금도 난춘과 품행제로를 듣고 있는데 욜라탱고에서 들었던 난춘의 느낌 때문에 파도가 보고 싶어져요.

 

마지막으로 신청했던 안예은의 품행제로. '난 정말 모-르겠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하며 노래가 시작되자 놀라는 분이 있었어요. '어 이거 안예은 아냐?' 하고요. 안예은님이 꽤 유명하긴 하지만 이렇게 간접적으로 아는 사람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안예은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구나, 하고 내심 반가웠어요. 그분이 스피커에 핸드폰을 가져다 대어 노래 검색을 하고는 '품행제로래. 노래 좋다'라고 했는데 그분에게도 좋은 노래가 된 것 같아 흐뭇하게 술을 마시다 왔어요.

 

욜라탱고는 한나님이 말한 대로 샹그리아가 무척이나 맛있었어요. 전에 마신 샹그리아는 술과 과일 맛이 잘 어울리지 않아 이도 저도 아닌 맛이 났는데 과일과 와인이 잘 어울리고 달고 맛있었어요. 서울에 올라가면 울프의 진토닉을 마시러 가고 싶어요. 울프의 진토닉도 혁명적으로 맛있거든요. 이때까지 마셔본 진토닉 중에 제일 맛있었어요.

 

품행제로에 대한 글을 쓰고 품행제로 노래를 듣는 것. 품행제로의 딱 5분만, 딱 10분만 하는 가사가 저를 펍에 계속 붙잡아뒀어요. 우리 좀 쉬어가자 라는 말이 어찌나 샹그리아만큼 달콤하던지. 그 가사를 들으면 왜 울컥할까요. 우리 좀 쉬어가자 아무런 생각 없이 하나하나 각자의 리듬이 있으니-

 

펍에 흘러나오는 다른 노래들을 듣다가 문득 왜 대전에 왔더라, 분명 한나님의 글을 읽고 오고 싶었지, 그런데 그것만으로도 오고 싶은 게 가능한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왜 대전이 아니면 안 됐을까 대전의 무엇 때문에 오고 싶어 했을까를 생각했을 때 답을 단번에 내지 못했지만 택시를 타고 숙소에 가면서 알았어요. 아 이런 풍경 때문이었지, 하고요.

 

 

불 켜진 엑스포다리. 택시에서 이 풍경을 봤어요. 이건 그 다음날 찍은 사진이지만

 

제가 택시를 타고 올 때는 엑스포다리의 불이 켜져 있고, 호텔 체크인을 하고 다시 엑스포다리로 갔을 때는 불이 꺼져있었어요. 엑스포 다리는 11시에 조명이 꺼지거든요. 불이 꺼져있음에도 강의 일렁임에 마음이 동하고 비가 온 뒤라 선선한 강바람이 들이치고 잔잔하게 들리는 풀끼리 부딪혀 사-, 나뭇잎끼리 부딪혀 스아- 하는 소리가 날 때 아 이 풍경 때문에 왔지 했어요. 이 풍경을 보러 왔지. 이 풍경이 나를 불렀지.

 

조명이 꺼진 엑스포 다리를 1시간 넘게 앉아서 바라보는데 지나가는 사람은 한두 명이었어요. 그래서 눈치를 조금 보다 욜라탱고에서 포장해온 샹그리아 뚜껑을 열어 입으로 들이켰어요. 노래는 아이묭의 On This Day We Say Goodbye를 계속 듣고 있었어요. 내일이 오는 건 알아, 어제가 돌아오지 않는 것도 알아 하지만- 하는 가사가 왜 그리 큰 울림을 주었던 걸까요? 이 노래에 하천을 걷는다는 가사가 나오는데 비슷한 상황이라 더 마음에 와 닿았던 걸까요?

 

그렇게 2020년 06월의 마지막 금요일과 대전에서의 첫날을 마무리했어요. 트위터에서는 즐겁게 떠들었던 것 같은데 현실은 다소 그렇지 못했습니다.

 

밤하늘과 동화되어 까만 엑스포다리를 보면서 또 와야겠다 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때 엑스포 다리도 그대로 있기를.

 

이번 주는 대전 이야기 위주일 것 같아요. 대전역에서 대전 이야기를 다 쓰고 가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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