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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즈라이트

YES가 YESBIAN이 되는 책 - 해가 지는 곳으로, 최진영

서울숲

올해 1월에 했던 독서모임에서 최진영 작가님의 <해가 지는 곳으로>라는 디스토피아 소설을 읽었어. 세 번 정도 읽은 소설이고 지금은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게 된 책이야. 어제 새벽에도 이 책을 읽었으니 벌써 네 번이나 읽었네. 바이러스가 전 세계에 퍼져 종잡을 수 없게 된 상황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지금 상황과 많이 겹치지 않니?

 

이 책에선 바이러스 때문에 사회 시스템이 붕괴되어 사람들이 서로를 죽이고 도둑질하고 강제로 남의 것을 빼앗고 도망다녀. 여자들은 강간당하거나 죽임을 당해. 현실적이라고 생각이 드는데 소설에서까지 현실적이고 싶지 않아서 처음에는 이 소설을 좋아하지 않았어. 작가님이 세부 묘사 없이 건조하게 표현했다고 한들 불쾌한 건 불쾌한 거니까. 그리고 립스틱이 레즈비언 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도 싫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 건 이 둘이 계속 만나기 때문이야. 떨어져도 다시 만나. 너와 내가 재난 상황이면 다시 만났을까? 만났다 떨어져도 계속 서로를 사랑했을까? 오히려 서로를 잊지 않았을까?

 

이 소설엔 도리와 지나라는 레즈비언 커플이 나와. 도리는 유일한 가족인 동생 미소를 지키기위해 필사적으로 생존에만 매달리고, 지나는 그에 비해 가족들의 보호를 받으면서 생계를 유지해 나가. 둘이 처음부터 커플은 아니고, 지나가 외진 곳에 숨어있던 도리와 미소를 발견하고 가족들을 설득해서 도리와 미소가 지나와 길을 함께하게 되면서 사랑하기 시작해. 지나는 가족들을 신뢰하지만 도리를 통해 현실을 마주해. 자신이 여성이라는 현실과 가족은 허울 좋은 가짜 울타리였다는 사실을 깨달아. 도리는 지나를 보면서 언어와 사유에 대해 생각해. 책 속 주인공들은 글자를 읽지도, 글을 이해할 수 도 없는 러시아로 도망쳤거든.

 

둘의 사랑은 다른 설명을 할 필요도 없이 YES지만 내가 이 책을 읽고 YESBIAN(예스비언)까지 외칠 수 있던 건 지나와 도리가 삶을 대하는 태도 때문이었어.

 

도리 : "그런게 지나의 희망인지도 모른다. 국경을 넘거나 벙커를 찾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희망. 과거를 떠올리며 불행해하는 대신, 좋아지길 기대하며 없는 희망을 억지로 만들어 내는 대신 지금을 잘 살아보려는 마음 가짐.

 불행이 바라는건 내가 나를 홀대하는 거야. 내가 나를 하찮게 여기고 망가트리는 거지. 난 절대 이 재앙을 닮아 가진 않을 거야. 재앙이 원하는 대로 살진 않을 거야."

 

지나 : "그런 것들을 궁금해하면서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묻지 않고 바라보기만 했다. 덜컹거리는 차 안에서 침묵을 대답 삼아 마음으로만 말을 걸다 보니, 그런 거 몰라도 그만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도리의 상처를 모르고 도리는 나의 상처를 모르고, 그러니까 서로를 지금 그대로 볼 수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만의 이야기를 새로 쌓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여성들끼리 사랑하는 게 너무 멋지지 않니?

 

삶에 대한 긍정적 태도를 가지고 있고, 서로의 배려가 전제되어있는 건강한 레즈비언의 연애는 어떨까에 대해서 생각해. 돌이켜보면 나는 그렇지 못했거든. 연애를 했을 때는 우울했고 삶에 별 다른 희망이 없었고 상대방에게 너무 의존적이었어. 그래서 길게 사랑하지 못했나 봐. 건강하지 못해 마라톤 완주를 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야. 사랑에 완주가 있는 건 아니지만 쉽게 포기해 버니까. 

 

그래서 나도 내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려고 노력해. 물론 잘 되진 않고 결국 자신을 미워하게 되지만 예전보다 내 자신이 밉지 않아. 그리고 미워지려고 할 때마다 생각해. 그때 내가 한 선택은 내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 했던 그 당시의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그래서 지금까지 살아있을 수 있던 거라고. 

 

코로나 시대의 사랑에서 레즈비어니즘이 자신을 포함한 여성을 사랑하는 일이라고 하잖아. 나는 그래서 나 자신에게 너그러워지고 나를 사랑하는 것부터 시작해보려고 해. 언제나 나 자신에게 제일 매몰차고 남같이 대했거든. 이제 나도 내 인생에 YES를 외쳐볼까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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