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색 선을 따라 잔디밭 같은 녹색 선에 발을 잠깐 올렸다 미끄러져 노란 실에 올라타면 밖에서 땅으로 땅에서 다시 밖으로 나갈 수 있던 야탑역. 지금도 야탑역에 가는 방법은 달라지진 않았지만 분당선은 그때보다 여러 매듭이 생겼더군요. 언제나 돌이켜보면 많은 것이 달라져 있어 감탄과 비슷한 탄식을 내뱉게 됩니다. 오늘은 어쩐지 레몬 탄산수가 끌리네요. 날이 추워져서 그런가 봐요.
중고등학교 때 축구를 좋아했어요. 축구를 하는 게 아니라 축구 경기 관람을 좋아했어요. 제 몸을 움직여서 땀을 흘리는 건 싫었지만 축구라는 스포츠가 만드는 긴장감이 좋았고, 공 하나에 맹수같이 달려들어 드넓은 경기장 이곳저곳을 휘젓고 다니는 축구선수들이 멋있었어요. 멋있다고 느끼는 감정은 스스로가 이루고 싶던 모습들 중 하나였다는걸 뒤늦게 성인이 되어 깨달았지만 그건 일단 뒤로 하고 찬 바람을 이기며 야탑교까지 걸어갑시다. 요즘 춥죠? 골목도 2번 정도만 꺾으면 되고 가는 길도 길지는 않으니 걸음을 빠르게 해 봅시다. 그래도 탄천 경기장은 역에서 가까운 편이니까요.
축구 좋아하세요?
축구는 11명이 모여 한 팀을 이루어야 하고 상대 팀도 선수 11명이 있어야 경기를 할 수 있습니다. 22명이라는 어마어마한 수가 모여야만 정식 게임을 진행할 수 있지요. 거기에 후보선수, 2군 선수, 감독, 코치, 심판, 부심판, 팀 닥터 등등 골을 넣어 우승하기 위해 모두가 자신의 분야에서 시간과 에너지와 지식을 쏟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팬이 함께하죠. 경기의 흐름은 선수들의 컨디션이나 감독의 전략이 주도하긴 하지만 팬들의 응원은 경기장에 파도를 불러일으킵니다. 경기 전부터 울려 퍼지는 팬들의 응원소리는 서로의 물살을 밀어내는 싸움입니다. 그렇게 파도끼리 부딪혀 더 큰 물살을 만들어 내기도 하고 그 큰 물살에 휩쓸려 한쪽의 파도는 자취를 감춰버리기도 합니다.
당신은 당신을 응원하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고 힘들게 귀를 기울인 말이 당신을 타박하는 말과 삿대질임을 알았다면 어떨 것 같나요? 그들은 당신이 무엇을 하든 당신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당신이 벤치로 도망쳐도 벤치에서도 그들의 눈을 피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더 뚫어지게 쳐다보며 집요하게 공격할지도 모르지요. 난입하여 당신을 해칠 수도 있습니다. 무섭고 도망가고 싶어 질 것 같지 않나요? 반대로 당신이 넘어지고 헛발질을 해도 사람들이 '일어나면 돼, 할 수 있어, 힘을 내'라는 말을 하며 함께 노래를 불러주고 박수를 쳐주면 어떨 것 같나요? 빨리 일어나서 더 뛰고 싶어 지지 않을까요? 축구는 그만큼 멘탈 싸움이기도 합니다. 멘탈은 개인이 책임져야 하지만 주변 환경과 사람에 그만큼 영향을 받으니까요.
성남의 축구하면 어떤 게 떠오르세요? 탄천종합경기장으로 발을 옮기고 있어서 성남FC라고 대답할 것 같은데 혹시 성남FC가 성남 일화 천마였던 거 아세요? 통일그룹에서 운영했을 때의 이름이 성남 일화였는데 성남 일화의 자매팀으로 충남 일화 천마도 있었어요. 이건 몰랐죠?
통일그룹의 사정으로 남자 축구팀인 성남 일화는 시민구단으로 바뀌었지만 여자 축구팀인 충남 일화 천마는 2012년에 해체됐어요. 성남 일화를 유지시키기 위해 성남 구단 팬뿐만 아니라 K리그 팬, 성남 지역 스포츠 관계자, 성남 국회의원, 시의원들이 나서서 성남 사수 운동을 나섰어요. 결국 성남 일화는 성남시에서 인수하여 시민구단으로 전환되었습니다. 남성 스포츠는 역사를 이어나가고 있지만 여성 스포츠 한 팀은 역사로 남게 되었죠. 이제 충남 일화의 유니폼은 땀에 젖지 않고 충남 일화 선수들이 찼던 충남 일화의 공은 더 이상 굴러가지 않습니다. 충남 일화 선수들은 강제로 팀을 옮기게 됐고, 자유계약 상태가 됐고, 은퇴했습니다. 선수들은 지금 뭘 하면서 지낼까요? 당신은 선수들이 뭘 하면서 지낼 것 같나요?
혹시 전부 은퇴했다고 생각하시나요? 충남 일화에서 1년 동안 뛰었던 강유미 선수는 지금 경주 한국수력원자력 여자 축구팀에서 뛰고 있습니다. 윙으로써의 실력이 탁월해 국가대표도 2번이나 발탁됐을 정도로 뛰어난 선수입니다. 그가 빠르게 빈 공간을 찾아 공을 발로 낚아채 돌진하는 모습을 보면 정말 맹수 같다는 생각을 하게 돼요. 언제 같이 축구 보러 가요.
왜 성남에 와서 충남 이야기를 하는지 궁금해요?
야탑교는 여전히 바람이 강하네요. 올 때마다 겨울인 것 같은데 매번 동상에 걸릴 것 같은 칼바람에 매번 몸이 움츠러들어요. 목도리 더 단단히 매요. 벌써 이렇게 추우면 나중에는 더 추울 거예요. 장갑 가져왔는데 장갑 한쪽 빌려줄까요?
대학 축구 본 적 있어요? 저도 두번 정도 보러 갔었는데 앉는 공간도 마땅하지 않은 곳이 많더라고요. 그런데 을지대학교에도 여자축구팀이 있다고 하더군요. FC HALO라고. ‘Have A Life Opportunity’가 팀명 풀이라는데 축구로 인생의 새로운 찾자는 뜻이래요. 거창하긴 해도 멋지지 않아요? 아직도 있을까 싶어서 찾아봤는데 아무래도 올해는 코로나바이러스로 모임을 못하다 보니 별다른 소식이 없네요. 작년까지는 활동했던데 아쉬워요.
FC HALO는 성남FC에 연간 코칭을 받는다고도 해요. 성남FC는 축구학개론이라는 이름으로 여자축구 교실을 주최하기도 해요. 지역사회로 묶여 있을 때의 장점은 이런 거겠죠. 하지만 역시 여자 프로 축구팀이 있었다면 더 많은 것들을 할 수 있었을 거란 생각은 떨치질 못하겠어요. 남자 축구팀에서 여는 여자 풋살 대회, 남자 축구팀에서 여는 여자 축구 코칭. 전문 인력이 쏠려 있고 자본이 쏠려있어 어쩔 수 없지만 여성들은 그렇게 팀과 팀으로 연결될 수 있는 기회를 잃게 돼요. 그렇게 여성들은 도움을 받아도 연결이 차단되는 현상을 겪어요.
도움도 필요한데 연결도 필요한 여성들. 비단 축구만의 문제가 아니라서요. 그래서 그런데 오늘 축구 한번 보고 결정해줄 수 있어요? 저랑 같이 스포츠 보러 다니는 모임 만들어 보지 않을래요? 축구 경기도 다 같이 보러 가고 시간 될 때 다 같이 모여서 풋살도, 농구도, 배드민턴도 해요.
물살로 응원하는 선수들의 등을 밀어주고 싶어요.
그리고 이젠 멈춘 공보다는 구르는 공을 보고 싶어요.
구르는 공을 보고 있기보다는 공을 굴리고 싶어요.
같이 해줄래요?
당신을 기다릴게요.